SURVEY

김시원: 전시-사건의 일

김시원 개인전 《확신이 들지 않을 때는 일단 사각형을 그리세요》(합정지구, 서울, 2020); 김시원 개인전 《반복되지 않아요》(금천예술공장, 서울, 2022)

 

 

1-1. 

김시원의 작업은 스스로에게 부과한 일련의 지시문과 수행으로부터 파생된 결과물로 구성된다. 지시문은 바닥에 천을 펼친 후 마음에 드는 모양이 도출될 때까지 끌어 올린다든가(〈무제(∧)〉, 2016-2017) 하루에 한 번 A4 용지 한 장을 구겼다 펴기를 반복하는(〈무제(하루 일년 일생)〉, 2014, 2022) 등 대체로 자의적이고 단순한 것이다. 이에 따른 수행은 즉흥성에 기대를 걸기보다 그저 특정한 행동을 해야 한다는 약속의 성격을 띤다. 이유와 의미를 묻기 이전에 일단 행동에 옮기는 태도와 그 행위가 남긴 흔적은 시간과 공간을 이용하거나 채우지 않겠다는 무용한 결단에 근접해간다. 목적이 배제된 결백한 명령과 무해해보이는 수행의 증거가 놓인 전시장은 관객을 약속에 연루시키는 구간이 된다. 그가 펼친 전시장은 대게 여백이 많으며, ‘작품’의 형태로 제시되는 수행의 내용은 그것을 행하는 작가 외에는 타인에게 전혀 위해가 될 것이 없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보고 있기만 한 이를 안전하게 두지는 않는다. 그것은 나를 긴장시킨다…

 

2. 

《확신이 들지 않을 때는 일단 사각형을 그리세요》는 어디선가 잘못 들은 이야기 같다. 마포구 소재 미술 공간인 합정지구 뿐만 아니라 의정부의 한 빌라로까지 전시가 연장된다는 것도 그렇고 그곳에서 일어난 일을 설명하려 해도 줄기가 될만한 내용이 딱히 없다는 점에서 그렇다. 합정지구에는 아무 것도, 그러니까 침착하게 들여다볼 형상이나 꼼꼼하게 더듬어 볼 질감 같은 것도 없었다. 색과 형태가 소거된 그곳에서 주의력이 고일 곳은 내 걸음 뿐이었다. 유리문을 밀고 들어간 네모 형 갤러리에 흰 벽이 좁은 길만 남기고 서 있었다. 그 좁은 길은 여러 갈래의 선택지를 주지 않고 그저 한 곳으로만 걷도록 했다. 흐르는 물의 폭이 좁아지면 물살은 빨라진다. 점차 주의가 흐트러지고 걸음이 빨라지자 매고 있던 백팩이 구석에 쓸렸다. 끝내 도착한 곳은 반듯한 네모였다. 거기에 아무도 없었다. 물론, 거기에는 내가 있었다. 건물 밖에서 보면 유리창을 통해 빙빙 돌고 있는 내가 잘 보였을 거다. 하지만 어둑어둑해지던 골목에는 아무도 없었다.

지하로 내려가자 마주한 것은 어둑한 남색으로 칠한 곳을 가득 채운 직육면체였다. 그것은 너무 커서 그 형태를 한번에 알아볼 수 없었고, 그 주위를 빙 둘러 걸을 수 있는 동선을 형성하기 위한 장치 역할을 했다. 좁은 틈을 남기고 공간을 거의 다 체운 직육면체와 벽에 사이를 너덧 바퀴쯤 돌고 나서야 사람 목소리가 들렸다. 걷는 중에는 잘 들리지 않아 가방과 겉옷을 곁에 부려 두고 한 구석에 주저 앉았다. “왔던 길 그대로 가고 있는 거 맞아요?” … “뭔가 굉장히 돌아온 것 같아서요.” … “벗어나지 못할 것 같은데요 아마.” … “네. 죽을 때까지 … 벗어나지 못할 것 같아요.” 이야기는 함께 어디론가 향하는 사람들에 대한 것이었는데, 한 방향으로 전개되지 않고 제가 빙빙 돌아야 했던 길처럼 처음과 끝이 이어져 있는 듯했다.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와 이야기의 중반부터 듣는다 해도 놓친 것이 없을테고, 운좋게 처음부터 듣는다 해도 그것이 이야기의 시작인 줄 알지 못했을 것이다.

또 다른 전시 장소였던 의정부으로 출발했을 때, 그곳에도 아무 것도 없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걸 알면서도 약 50분간 지하철을 타고, 18분 정도 걸어 빌라 건물에 도착했다. 마치 의무를 다하듯, 나를 콕 집은 초대에 응하듯 문을 열고 들어간다. 한 방 안에 서로 다른 크기의 직육면체 네 덩이가 서 있다. 사용감이 지워진 방에 놓인 각 직육면체 안에는 본래 방에서 쓰던 가구가 들어있다고 한다. 예상이 맞았다. 거기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곳에 놓여 있던 구체 혹은 잡다는 지워졌다. 그런데 이 방의 면적은 합정지구 지하에 놓인 큰 직육면체의 그것과 동일하다. 합정지구에서 직육면체 둘레를 돌아야했다면, 의정부에 와서야 그 내부에 들어와볼 수 있었던 것이다. 두 공간은 ‘외부’와 ‘내부’의 관계를 지시하거나 설명하는 대신 발로 걸어 가늠하도록 한다. 

이렇듯 김시원이 운용하는 시공간은 언젠가 누구에게 건너들은 사건과도 같다. 세부사항이 소거되고 경험 가능한 뼈대만 남기 때문이다. 현상학이 말하는 지각 탐구의 핵심 장치인 판단중지(epoche)는 평소에 우리를 좌우하는 선입견을 괄호 안에 밀어넣어 순수한 체험과 의식을 획득하도록 한다. 전시장에 가서 미술을 경험한다는 것은 구체적인 형상이나 내용을 상기하여 관객의 감정과 기억을 자극하는 것일까? 미술 작품이란 반드시 해독해야 하는 내용을 지니고 있어야 하며, 그것을 ‘독해’해내는 것이 미적 경험일까? 생활 공간에 존재하던 사물을 반듯한 직육면체에 가두고, 전시장에는 읽어낼 거리를 남기지 않는 김시원의 소거법은 그가 미술의 역할과 미적 경험의 가능성을 탐구하는 방법론이다. 그의 ‘순수’ 실천은 사유를 주어진 공간 너머로 일어날 수 있는 연상 작용을 차단시키는 한편, 그안에서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하도록 한다. 거기서 내용 없는 형식과 그 형식이 가능하게 하는 경험을 되새김질한다. 

 

3. 

2년 뒤, 또 다른 김시원의 시공간에 이르렀다. «반복되지 않아요». 이 전시가 열리기 전, 그는 과거에 했던 어떤 전시를 다시하는 것을 해볼까 고민 중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가 언급한 과거 전시에 대한 기억이 없었다. 가 본 적이 없으니 당연히 그랬다. 좋은 생각이라며 그를 부추겼던 것은 내가 보지 못했던 전시를 보고 싶다는 순전히 이기적인 마음에서 온 것이었다. 반복이 필연적으로 부재에 빚지고 있다는 점은 때로 큰 위안을 준다. 내가 없었던 시점에도 전시라는 사건은 일어나고, 내가 직접 보지 못했더라도 그 일이 일어나고야 말았다는 것을 믿을 수밖에 없으며, 그 사건이 반복될 때 내게는 처음일지라도 재연된 것이라 인정해야만 할 것이다. 다만 왜 하필 그 전시를 반복해야 하는지, 그 반복이 과거의 사건을 실제로 보았던 이들에게는 무얼 의미할지는 의문이었다. 반복은 원본의 미완결성을 증거하는 걸까? 아직 못다한 숙제 같은 것이었을까? 

그리고 그 사건은 기어코 다시 벌어졌다. 총 여섯 점의 출품작은 저마다 충분한 거리를 두고 자리를 잡았다. 각각은 특정한 행동을 지시하는 (손글씨로 작성하고 표구한) 텍스트와 지시문을 수행한 결과물로 구성되어 있다. 저마다 다른 지시문이지만 다분히 임의적이며, 별다른 효용이 없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어쩌면 싱거운 요구사항인데, 그것을 읽어내려갈 때마다 긴장이 고조된다. 그것은 수행자에게 시간을 가르는 법을 알려주고 있었다. "23시 59분에 1분 동안 지속되는 폭죽을 쏘아" 올리고 이를 "영상으로 기록하고 0시부터 23시 59분까지 상영"하라는 <무제(어제 내일)>(2014, 2020)는 하루를 행위하며 기록하는 시간, 그리고 기록된 구간을 상영하는 시간으로 양분한다. <무제(하루 일년 일생)>(2014, 2022)는 “한 해 첫날에 시작해서 마지막 날까지” “하루에 한 번씩 빈 A4 종이를 구겼다” 펼 것을 요구하여 1년을 지배한다. 아마 김시원은 전시가 진행되는 동안에도 이 명령을 지키기 위해 매일 지시문 곁에 놓인 종이로 와서 한 번씩 구겼다 펴는 일을 했을 것이다. 

이처럼 단순한 명령문을 하나씩 발견할 때마다 뒷목이 뻐근했던 것은 수행문의 구문적 특성상 나를 향한 요청으로 읽혔기 때문이다. 그 요청을 따르는 상상을 한다. 나의 하루를, 그리고 1년을 재배열해야만 한다. 우리는 저마다 시간을 다른 방식으로 형상화한다. 0시부터 24시, 월요일부터 일요일, 1월부터 12월 등 시간의 흐름을 분절하는 공인된 단위들이 존재하지만 이를 떠올릴 때 위에서 아래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일직선으로, 곡선으로, 원형으로, 우리는 전혀 다른 궤적을 그린다. 우리의 선택과 행위가 시간을 채운다고 인식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시간이 행위를 관통해 간다고 느끼는 이들도 있다. 흐르는 시간을 붙잡으며 사는 사람과 가만히 있는 시간을 밟고 지나가는 사람,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 시간을 자원처럼 투입하거나 연료처럼 태우는 사람, 푹신한 시간 속으로 침잠하는 사람. 사람들이 《반복되지 않아요》에 진입한다. 

하지만 우리는 김시원의 지시문을 따를 의무가 없으며, 작가가 그것을 이행하며 도출한 결과물을 바라보도록 제안 받을 따름이다. 수행의 결과물은 정확하고, 정갈하다. 종이는 고르게 구겨져 있으며, 빗금은 반듯하다. 보는 이가 수행하는 이를 의식하지 않도록 상당히 신경써서 만든 것이 분명하다. 이는 지시문을 성실히 수행하되 그것을 수행하는 이의 성실함 혹은 ‘작가의 손 자체가 극적인 내용이자 주제가 되는 일을 예방한다. 앞서 언급한 내용의 소거는 여기서 만든 이의 소거로 연결된다. 약속은 지켜졌다. 어떤 전시는 반복되었다. 명령과 그것의 이행이, 한 사건과 그것의 재연이 맞붙어 선형적 시간이 구부러진다. 일상적 시간을 장악하는 의지, 의무, 착취, 저항의 원리는 효용이 없는 임의적인 원칙과 반복으로 인해 잠정적으로 얼어 붙는다. 

 

1-2. 

2년을 터울로 두고 벌어진 두 사건은 전시란 무엇이며, 어떤 작용을 하는지 질문한다. 김시원의 개인전이라는 명목 하에 일어난 두 사건은 특정한 내용을 전달하기 위한 매개체로서의 전시가 아니라 공간과 시간을 재조정하는 구간으로 작동한다. 전시장을 찾아가 그곳에서 시간을 보낸다는 것은 일종의 호명을 받음으로써 경험의 기본 단위를 재고하는 일이다. 김시원의 작품이 지시문과 그것의 이행으로 맞물리듯, 전시 또한 불특정 다수에게 특정한 사건이 벌어질 것에 대한 공표와 이에 응한 이들이 꼬리를 물고 있는 구조를 취한다. (하지만 공표에 응하지 않은 경우, 즉 지시문 혹은 초청을 인지하지 못하거나 따르지 않는 ‘실패’의 사례를 배제하지 않는다. 거짓말이나 연극의 대사, 지켜지지 못한 약속 역시 발언이라는 점에서 김시원의 전시-사건은 완전무결한 호응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전시-사건은 모든 사건이 그렇듯 비가역적이다. 그것이 ‘좋은’ 전시였는지의 여부와 무관하게 전시-사건이 일어난 후에는 이전과 같을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무용하고 반성적인 경계들, 즉 임의의 안과 밖, 이전과 이후를 창출해낼 것이기 때문이다. 

Previous
Previous

권동현×권세정이 되어가는 길

Next
Next

Solita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