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EY
남화연: 정박하지 않기, 그것은 또한 리듬타기
퍼블릭아트 2026년 4월호
국경과 강을 넘어 흘러들어온 노래, 독일 체류 중 생각을 멈추고 귀를 기울이게 한 새소리, 유튜브에서 마주한 최승희의 육성. 남화연은 때때로 어떤 소리에 이끌려 성긴 아카이브와 기억을 품은 사람들을 따라 궤적을 그린다. 식민지 근대와 분단 이후 이데올로기적 분절, 땅에 붙어 걷는 개미와 약 75년을 주기로 타원 궤도를 그리는 핼리혜성 등 산발적인 주제를, 영상과 퍼포먼스, 설치 등 여러 매체를 동시다발적으로 운용하며 다루고 있지만 그의 작업을 관통하는 것은 고유한 리듬의 생성이다. 그 리듬은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이동하고, 서로 다른 몸이 영위하는 시간대를 교차하는 시도에서 돌출된 엇나감과 머뭇거림이 드러낸 당김음, 쉼표, 변박으로 충전되어 있다.
작가의 대표작이라 꼽히는 작업군은 일제 시대에 태어나 전세계를 무대로 활동한 안무가 최승희를 다룬 것이다. 오며 가며 10여 년에 걸쳐 펼쳐진 프로젝트는 〈이태리의 정원〉을 부르는 최승희의 육성을 접하면서 가속도를 붙였다. 이 음향적 만남은 사실적 정보에는 인색했지만 격동의 시기에 남과 북, 제국과 식민지, 동양과 서양, 예술과 현실 사이에 놓였던, 소설을 능가하는 극적인 삶의 주인공을 숨과 목소리를 가진 존재로 불러오는 한편 결코 닿을 수 없는 공백으로 남겨둔다. 시청각 기록이 충분히 생산되거나 보존되지 못했던 시대적 조건, 그리고 정치적 이력으로 인해 단편적으로만 남은 자료들은 이미지 사이의 시간을 흐르게 하는 춤사위(〈에헤라 노아라〉, 2020), 월북 후에 만든 『조선민족기본무용』을 기반으로 북송선에서 전수된 춤사위를 체현한 인물(〈풍랑을 뚫고〉 , 2019), 그리고 흔들리는 바다를 바라봤을 최승희를 비롯한 친구와 작가 자신(〈사물보다 큰〉, 2020)을 느슨하지만 확실하게 연동시킨다. 남화연의 지난 작업이 “최승희에 관한 것이라기보다는 최승희를 통한 것”이라 언급한 큐레이터 김해주의 표현대로, 최승희는 오히려 악곡의 숨표처럼 공백을 통해 의외의 연대가 스미도록 한다.
한편, 좌표 지점에 따라 고향을 그리는 송가, 가락이 좋은 포크송, 젊은 시위대의 운동가요가 되는 한 노래를 다룬 〈임진가와〉(2018)에서 공백은 보다 구체적으로 전면화된다. 하늘색 화면으로 시작해 도쿄 신주쿠 지하철 역사로 들어가는 장면으로 끝나는 이 영상에서 걷거나 헤매는 몸, 계단을 오르내리는 발, 달리는 열차에서 창밖을 바라보는 시선은 1969년 신주쿠역 지하 광장에서 벌어진 게릴라 시위에 대해 밝혀낸 사실만큼이나 비중 있게 등장한다. 당시를 기억하는 인물과 동행하는 작가의 모습이나 인터뷰 내용이 통역되는 시간을 생략하지 않는, 시간이 희석해버린 기억을 애써 더듬는 인물들의 진술을 굳이 정리하지 않는, 때때로 유의미한 정보를 지우고 청량한 푸른 화면을 끼워 넣는 선택 속에서 리서치는 목적을 향한 경주가 아닌 궤적을 그리는 신체적 행위로 부각된다. 기보법상 음을 길게 지속하여 쉬도록 하는 페르마타처럼, 노래는 국경과 입장에 포획되지 못한 채 공기를 가르며 길을 간다.
시공간의 좌표를 이어가는 몸의 실천은 인간의 지각에 한정되지 않는다. 2015년 첫 개인전 《시간의 기술》에서 선보인 〈필드 레코딩〉(2015)은 채집, 분류된 새소리 아카이브로부터 작가가 발췌한 사운드를 듣고 따라하는 퍼포머의 모습을 담백하게 전달한다. 분류의 체계는 인간이 구성한 것이지만, 새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생리대로 소리를 낸다. 채집가는 기다릴 수밖에 없다. 새가 가청 범위로 다가와 주길, 그리고 그 부리를 열어 소리를 내기를. 제도화된 아카이브는 인간의 욕망과 과정 중 실패를 생략하고 중립적인 지위를 자처한다. 하지만 헤드폰을 통해 새소리를 듣고 따라 하려는 인간 퍼포머의 진지한 시도는 바로 그 진지함 덕분에, 순수한 지적 호기심과 실패의 불가피함을 가리키고, 끝내 실소를 자아낸다. 퍼포머는, 최초 채집자와 마찬가지로, 소리를 기다린다. 그 기다림을 통해 낯선 리듬에 접속하고 그것을 자신의 몸으로 재생해낸다. 이 전시의 도록은 출품작 영상 작품이 시간축을 따라 지면에 스틸컷과 캡션을 흐르듯 배치하여 한 장 한 장 넘기는 행위가 곧 음소거 버전의 영상을 재생하는 샘이 된다. 소리가 빠져 있는 〈필드 레코딩〉의 지면에는 푸른코아뻐꾸기, 가시올빼미, 카라카라매 등 새의 종과 마이크 앞에 앉아 입을 벌린 퍼포머의 이미지가 연거푸 등장한다. 출판물로 이 작업을 만난 이들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어딘가에 이름부터 낯선 어떤 새가 소리를 낸 순간, 그리고 그것을 포착하기 위해 긴 시간을 흘려보냈을 연구자들을 상상하게 된다.
한편 같은 전시에 포함된 〈동방박사의 경배〉(2015)는 행성적 차원의 기다림과 만남의 리듬에 다가간다. 영상은 맨눈 그 자체에서 시작하여 그 눈이 바라봤을 핼리혜성이라는 천체를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추적한다. 중세 말엽에 활동한 지오토는 그것이 무엇인지 모른 채 꼬리가 달린 별을 목격하고는 성화에 베들레헴의 별로 그려넣고, 이어서 그것은 망원경으로 관측되고, 마침내 회기 주기가 발견되고, 카메라를 비롯한 ‘눈의 연장’에 의해 포착된다. 여기서 인간과 기계의 눈, 그리고 그것이 생산해 낸 이미지는 약 76년마다 지구를 들러주는 혜성으로 인해 연결된다. 회기하는 궤도는 임의의 인물들을 역사 속에 함께 기입함으로써 직선으로 흐르는 인간적, 발전적 시간과 충돌한다. 3년 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선보인 퍼포먼스 〈궤도 연구〉(2018)는 태양계의 여타 행성과는 반대 방향으로 비스듬히 긴 타원을 그리는 이 행성의 궤도를, 운 좋으면 그것을 두 번 정도 볼 수 있을 수명의 몸에 포갠다. 주어진 공간의 선과 면에 기대어 절도 있는 포즈와 무질서하게 연결하는 움직임의 연쇄는 절정으로 누적되지 않고, 오히려 통째로 기다림의 시간으로 육화된다. 어쩌면 우리는 어제보다 더 많이 아는 오늘과 더 밝은 미래를 향해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1986년, 1910년, 1835년, 그리고 그 이전에 이미 그것을 만났던 사람들과 눈맞춤을 하는 순간을 기다리고 있다.
올 초 싱가포르 아트 뮤지엄(SAM)에서, 2020년 개인전 《마음의 흐름》에서 선보인 퍼포먼스 〈에헤라 노아라〉를 다시 만났다. 6년 전, 무대 대신 서로 다른 높낮이의 좌대, 기록물과 조각, 영상 등이 어우러진 전시장을 가로지르며 펼쳐졌기에 이 작품을 기록 영상이 아닌 퍼포먼스로 다른 전시장에서 만날 수 있을 거라 예상하지 못했다. 1933년 최승희의 ‘에헤라 노헤라’는 갓을 쓰고 도포를 입은 채 찍힌 사진 몇 장의 포즈만 남아있는데, 남화연의 〈에헤라 노아라〉에서 퍼포머는 정적인 이미지 사이의 공백을 가동하는 동시에 파편적으로만 남아 있는 관련 정보를 읊어내는 이중적 역할을 수행한다. 상실된 춤사위를 현재화하는 듯한 발걸음에 최승희에 대한 세간의 반응을 내레이션으로 발화하는 순간, 퍼포머는 원전을 복기하는 몸이 아닌 움직이고 말하는 아카이브가 된다. 마치 남화연에게 최승희가 다른 세계들로 연결되는 프리즘이 되어 주듯, 이 공연 속 몸은 기꺼이 여러 시공간이 통과해 갈 수 있는 일종의 탈 것이 된다. 2026년의 공연은 필연적으로 새로운 동선과 새로운 호흡을 요구한다. 매번 갱신되는 몸. 최승희가 일본에서 처음 춘 조선 무용이라는 기록만 남은 이 춤이 배태한 빈칸은 매번 다르게 울린다. 숨표의 길이가 연주자의 해석에 맡겨지듯, 부재 역시 반복될 때마다 새롭게 지속된다. 이 스코어는 앞으로도 자신만의 궤도를 그리며, 어떤 몸이 어디서 그것을 다시 품을지 모르는 상태로, 회귀할지 모른다.
이러한 시간의 조형은, 정확한 박자를 뜻하는 정박(定拍)과 닻을 내려 한 자리에 머무는 의미의 정박(碇泊) 양쪽의 의미에 고요하지만 정확하게 맞선다. 나이대에 맞는 선택의 연쇄, 과거보다 나은 오늘을 만들어야 한다는 선형적 다짐, 역사적 서사를 고정하고 개인의 지독한 모순을 매끈하게 밀어버리는 이데올로기의 작용, 글로벌 자본주의 아래 수치화되는 생산성. 이러한 유무형의 압박에 강세를 찍지 않고, 한 지점에 닻을 내리지 않는 실천을 통해서 말이다. 남화연의 작업은 이러한 이탈의 모멘텀을 그 반대편으로 달리는 것이 아니라 기꺼이 길을 잃고, 서로 다른 스케일의 시공간을 포개고, 지연과 회기의 시간을 건너 뛰는 대신 충분히 음미하는 데서 찾는 듯하다.
2061년, 핼리혜성이 다시 지구에 근접하기로 예측되는 해다. 이 글을 쓰는 시점으로부터 약 35년 후, 이 글을 쓰는 사람이 살았던 만큼 다시 살아야 돌아오는 시점이다. 그때 〈에헤라 노아라〉의 스코어는 어떤 몸 위에서 다시 숨 쉬고 있을까. 거대한 역사의 풍랑 속에서 흔들리는 배 위에서 춤사위를 주고받듯, 빈칸은 채워야 할 과제가 아닌 또 다른 리듬을 위한 무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