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HIBITION PREFACE
이승찬 개인전 《Combicess》에 첨부함
이승찬 개인전: Combicess
3 - 29 September, 2020
Space Hyeong, Seoul
네거티브 타불라 라사
시작은 ‘A 시리즈’, 즉 검은 사각형 연작이었다. 분명 그전에도 무언가 있었겠지만, 선언적인 출발은 여기에 있다고 보는 것이 용이하겠다. 캔버스에 잉크젯 프린터로 여러 이미지를 겹쳐 출력하여 도출된 검은 사각형은 일종의 ‘네거티브 타불라 라사(tabula rasa)’다.
타불라 라사는 깨끗한 석판을 의미하는데, 서구사상사에서 외부세상으로부터 어떠한 자극도 받지 않은 정신 상태를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특히 근대 경험주의자들은 선험적인 준거 없이 백지상태의 마음을 가지고 태어나 경험을 통해 지적 능력을 갖추게 되는 인간 존재를 설정하여 인식론을 전개했다. 이는 전근대적 구습을 지우고 세계를 이해하는 체계를 처음부터 다시 세우려는 시대적 과제에 충실했던 조치이기도 하다. 비가역적인 분열과 중첩된 기입으로 인해 두 개 혹은 그 이상의 마음을 갖게 된 포스터모던 이후의 인간들, 더 구체적으로는 근본 없음에 대한 콤플렉스를 무자비한 발췌와 조합으로 보란 듯이 극복해온 민족의 후손에게 새 판 짜기의 특권이 주어진 적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출발선의 설정은, 특히 페인터에게, 시급한 것이었다. 무수한 모방의 연쇄가 비트맵 이미지의 세계뿐만 아니라 현존을 지배하는 원리로 부상하면서 페인터는 이중으로 소외되었기 때문이다. 페인팅이 거대한 데이터베이스 속에서 특권적 지위를 누릴 수 없게 되면서 한번, 주어진 정보를 분별, 해석, 변형하는 자격을 독점적으로 누릴 수 없게 되면서 또 한 번.
산뜻하게 다시 시작할 수 없다면, 아예 판을 검게 만들어버리는 것이 바로 다음으로 급진적인 시도가 될 수 있겠다. 말장난 같지만 검게 칠한 캔버스는 일종의 백기에 준하는 것이었다. 검은 백기 – 상황이 이런데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그리라는 말이냐! – 를 뽑아 들 때, 비로소 그다음을 도모할 수 있을지도 모를 일. 타불라 라사의 반전, 즉 네거티브 타불라 라사는 (많은 급진적인 힘이 그렇듯) 구체적인 목적성을 결여한다. 검게 칠해 확보한 반전-공백 위에 올려 담아야 하는 그 ‘무언가’는 특정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캔버스 표면이 검게 변하기까지 ‘무엇’을 표상한 이미지가 출력되어야 하는지를 일러줄 기준은 없다. 이로 인해 ‘예술가의 손’은 선택을 단념하면서 한번, 기계에 출력을 맡기면서 또 한 번 캔버스를 떠난다.
완료 여부를 결정하는 질문은 바로 이것이다. “충분히 검은가?” ‘충분히’ 검은 캔버스의 20여 개의 레이어 사이로 무언가 비쳐 보인다면 그것은 특정한 형상이 아니라 어떤 이미지가 있(었)다는 지표에 불과하다. 평면의 검음은 시각성의 단념을 의미하지 않으며, 오히려 강박적인 중첩으로 인해 보이지 않게 된 것 사이로 새어 나오는 것을 탐구하기 위해 적절한 현장이다. 깜깜한 밤에 차츰 적응한 눈이 사물을 더듬어갈 수 있듯, 검은 사각형에 머무는 시선은 복수의 잉크 층과 윤곽, 뭉침과 글리치를 발견하기 시작한다.
접촉 없는 분사, 종합되지 않는 중첩
검은 캔버스와 손의 후퇴는 불가피하게 회화(혹은 회화를 둘러싼 신화)에 대한 불신을 가리킨다. 하지만 이에 동원된 잉크젯 프린터의 원리는 (좁은 의미의) 회화의 프로세스와 곧잘 호환된다. 시리얼 커넥터를 통해 컴퓨터로부터 비트맵 데이터를 수신한 프린터의 로직보드는 이를 해석하여 헤드로 하여금 잉크를 적절하게 분사하도록 지시한다. 헤드에 부착된 얇은 노즐은 대지에 잉크 방울을 떨어뜨려 상을 구현해낸다. 마치 생각이 형태를 취하듯, 데이터는 물질로 이행된다. 이와 대조적으로 레이저 프린터는 대전기로 원통형 금속판이 음극을 띠도록 한 후, 이를 레이저로 부분 가열하여 잉크를 녹이고 그 판을 종이에 눌러서 데이터를 물질화한다. 굳이 따지자면 안료가 도포되어야 할 영역을 구분하고 대지에 압력을 가한다는 점에서 판화의 프로세스를 연상시킨다. 프린터의 성능(출력 속도와 출력물의 선명한 정도 등)을 고려하거나 매체의 복제 가능성을 더욱 풍부하게 다루고 싶다면 굳이 노즐이 막혀 망점을 뭉개버리거나 대지를 축축하게 만드는 리스크를 끌어안고 잉크젯 프린터를 고집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대지와 접촉하지 않는 출력을 거듭할수록 각 레이어가 교란되는 기계는 페인팅의 프로세스를 입출력 기계의 작동으로 유비하여 보는 관점을 열어준다.
잉크젯-프린트-온-캔버스에서 캔버스는 출력을 위한 대지이고, 이미지를 데이터로 처리, 전송하는 과정이 구상 단계를 대체하며, 안료의 애플리케이션은 노즐이 대신 진행한다. ‘재현’이나 ‘표현’의 ‘행위’로 여겨진 (좁은 혹은 오래된 의미의) 그리기는 인풋과 아웃풋의 연쇄로 구성된 출력의 프로세스에 다름 아니며, 페인팅은 이러한 프로세스를 아우르는 하나의 기계다. 페인팅-기계는 자연 언어나 예술가의 손을 개입시키지 않은 채 진행되는 이미지와 물질 간의 이행을 정보처리 프로세스의 일종으로 간주하여 거듭한다.
이러한 재정립이 회화의 지위를 위협하는 듯한 착시를 일으킨다면, 그것은 아마 창작자의 시점이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되었고(프린터 작동자가 어디에 서서 버튼을 누르는지는 기계의 실제 작동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페인팅의 지지체인 캔버스가 인쇄 용지와 마찬가지로 취급되기 때문일 것이다. 나아가 페인팅-기계론은 페인팅에 관여하는 여러 행위자와 도구를 동급으로 놓아 인간들을 섭섭하게 만든다는 아쉬움이 있지만, 분명한 유익을 제공한다. 이러한 접근은 페인팅과 관련된 혹은 페인팅 그 자체인 어떤 사건을 관찰할 때, 마치 객관식의 선지처럼 제공되는 습관적인 언어를 소환하는 대신 실제로 일어나는 일에 더 집중할 수 있도록 한다. 이미지/데이터의 양적 팽창이나 시뮬라크르의 전면화 등 현재 시각 장을 구성하는 특징을 섣불리 평가적인 언어로 재단하기 이전에 출력 잉크가 물감에 비해 투명도가 높아 여러 층을 쌓아 올릴 때 색이 중첩되어 섞이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는 점, 대지의 재질이나 두께, 표면 처리에 따라 여러 겹의 잉크에 다르게 반응하는 점, 노즐이 어떤 이유에서 고르지 않게 잉크를 분사하거나 여러 겹의 잉크가 겹쳐 올라가면서 뭉치는 실책 등을 더 면밀하게 확인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4C> 연작(2017~)부터는 이미지를 출력한 대지에 흰색 물감을 바르고, 그 위에 다른 대지를 덧대어 출력하여 여러 형태, 질감, 색채로 구성된 화면이 출현한다. 이 연작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시행착오를 통해 성취되는 변주다. 덧붙일 대지의 모양과 재질, 출력의 횟수 등을 통제하며 각 선택이 만들어내는 결과물을 확인하는 과정이 무수히 반복된다. 대지의 형태가 단순하고 크다면 결과물은 단순한 구성이 될 가능성이 크다. 반대로 매번 다른 형태의 작은 대지를 덧붙여 올린다면, 상대적으로 복잡한 레이어의 접합으로 귀결될 것이다.
여러 회차의 프로세스 끝에 중요한 반전의 시도가 있었다. 샌드위치마냥 대지를 중첩하고 이미지를 출력한 다음(번 위에 양상추를 올리고 그 위에 소스를 뿌린다), 그 대지를 제거하여 바탕 대지만 남기는 방법(양상추를 걷어내어 번에 묻은 소스만 남긴다)을 개발한 것이다. (이 과정을 지속하면 화려한 소스 범벅의 번만 남게 될 것이다) 이 시리즈 중 일부는 검은 종이 사각형을 바탕 대지로 삼아, 최종 결과물은 레이어의 지표만 남은 검은 사각형이 된다. 의미심장한 검은 사각형이 등장한 지 4년 만이었다.
반전된 목적론과 검은 사각형을 망각하기
<4C> 연작에서 확인한 바를 통해 역추적해보면, 선언의 일종이었던 검은 사각형은 이후에 산출된 여러 형태 및 장면의 모체로 작용했다. 사후적으로 계기를 특정해볼 수는 있겠으나, 어쨌든 처음에는 이렇게 될 줄 아무도 알지 못했다. 페인팅-기계는 고유의 지향성이나 ‘발전’에 대한 확약 없이 프린터, 잉크와 물감, 손, 대지 등의 협상 속에서 개별 평면을 거듭 생산해냈다. 반전과 반전의 반전, 중첩과 소거를 시도한 끝에 현재 시점에 최적화된 잉크젯-프린터-온-캔버스가 산출된다. 그렇다면 페인팅-기계의 메커니즘을 역추적하여 마지막 질문 – 검은 사각형에게 “충분히 검은가?”라고 물었던 것처럼 – 이 무엇인지 추측하고 그것의 역능을 가늠해볼 수 있을 것이다. 충분히 복잡한가? 형태와 색채가 충분히 균형 있게 배치되었는가? 충분히 낯설거나 익숙한가?
페인팅-기계의 작동 중 일어나는 물질의 교환이나 개입되는 여러 변수와의 협상이 축적됨에 따라 검은 사각형의 급진성은 (소멸하는 대신) 망각된다. 중요한 점은 도출된 평면이 ‘외부세계’에 제공할 수 있는 코멘터리의 유무 및 내용이 아니다. 오히려 주목해야 하는 것은 검은 사각형 위에 다른 색채와 질감이 효과적으로 중첩되기 위해서는 흰색 물감을 여러 겹 발라야 한다는 것과 이로 인해 겹쳐진 대지를 분리해낼 때 검은 바탕의 표면이 찢어지면서 흰 선이 흔적으로 남아 마치 색종이를 발랐다가 찢어낸 것과 같은 효과가 난다는 점이다. 이러한 발견은 페인터로 하여금 대지의 파열을 더 잘 보고 보여주기 위해 종이를 바탕 대지로 사용하도록 명령한다. “투명한 돌과 같은 작업을 만들어야겠다”는 태도로 엮인 연작 4C는 바탕의 색과 형태, 질감을 결정적인 변수로 이해하도록 이끈다. 그렇다면 배경과 그것의 형태로서의 가능성이 그다음 과제로 설정된 것은 개연성 있는 전개다. ‘Background’와 ‘Form’의 앞글자를 딴 연작 <BF>(2019~)의 바탕 대지와 그 위에 겹쳐진 대지(의 흔적)는 분명하게 구분되기보다 서로 밀고 당기는 긴장 속에서 여러 형태를 생성한다.
뒤늦게 정리하자면 이 글에서는 ‘기계’를 “움직이거나 일을 하는 장치”의 의미와 여러 행위자들이 개입하여 모종의 아웃풋을 산출하는 작용의 의미로 사용했다. 양가적인 의미에 비추어 볼 때, 프린터는 데이터를 물질로 구현해내는 도구인 동시에 예측불허한 변수를 생산해내어 작업의 과정 및 설계에 개입하는 행위자다. 노즐은 잉크를 분사하는 장치로, 마치 페인팅을 위한 브러시의 유사한 역할을 하지만 (브러시도 그러하듯) 예술가의 뜻을 투명하게 실현하기보다 이따금 설계자에게 명령을 내리기도 한다. 잉크젯-프린터-온-캔버스 혹은 페인팅-기계는 후자의 의미의 기계로, 의도를 배반하거나 구상에 개입하는 여러 장치들을 정당한 협상의 상대로 인정하여 개별 작업 사이의 미세한 차이와 프로세스의 ‘그다음’을 발견해간다. 이러한 점에서 이승찬의 연작들은 컴퓨터, 스캐너, 프린터를 활용하여 캔버스 표면을 운용하여 2010년대 초반 영미권이나 유럽에서 집중적인 조명을 받은 일련의 작가와 다른 길을 가게 된다. 새로운 도구를 도입하지만 결국 추상이나 숭고와 같은 전통적인 명분으로부터 원동력을 찾거나 대량생산의 가능성을 경유하여 현대사회의 (시각적) 병폐에 대해 비평하는 여러 시도는 극단적으로 말해 결과물-페인팅이 존재하지 않아도 완결되는 프로세스를 자랑한다. 물질의 교환 차원이 아니라 제작 방식에 부여된 의미에서 존재의 정당성을 얻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페인팅-기계는 ‘해소’해야 했을 페인팅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 – 아예 검게 칠해버리자! – 를 편리하게도 망각한다. 대신 실행 단계에서 물질이 중첩, 충돌, 소거되면서 발생하는 차이와 목적지 설정 없이 전개되는 변주가 거듭된다. 몰두할 수 있는 물질-플레이의 부상 덕분에 예술가는 당분간은 소진되지 않을 경우의 수를 탐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페인팅 혹은 페인터의 패배 선언처럼 제시된 검은 평면을 촉발한 딜레마가 해결할 수 없는 것처럼 느껴진 이유는 그것이 지나치게 관념적이었기 때문이다. 검은 사각형에 대한 망각은 주어진 조건을 물질적으로 검토하고, 반복적인 시도를 통해 여러 장치들이 서로 어떤 상호작용을 하며, 캔버스 위 형태들이 어떠한 변이를 일으킬지를 관찰하는 활동을 지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