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HIBITION PREFACE
실험실 파트너
오연진, 한지형: 리뷰렛 RIVULET
24 May - 6 June, 2020
Gallery 175, Seoul
과학을 딱히 좋아했던 것은 아닌데 입학하자마자 거의 모든 과학 입문 과목을 수강 신청했던 건 각 과목마다 딸려오는 실험 시간 때문이었다. 대학교 실험 수업에서는 교과서에서 보던 삽화나 관측 사진 같은 이미지를 직접 포착할 수 있을 거라 크게 착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재빠르게 수업에 흥미를 잃었고, 어느 시점부터 완전히 이해의 끊을 놓치자 그저 너를 돕기 위해 억지로 출석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너의 온몸은 언제나 해야 할 일을 아는 것처럼 움직였고, 마디마디 뼈마저 군더더기 없이 효율적으로 보일 지경이었다. 물론 다들 '생실'이라고 부르는 시간을 너 혼자 꼬박꼬박 '일반생물학 실험 수업'이라 말하는 것은 다소 비효율적인 것 같았지만.
그런 너를 볼 때마다 명치 아래쪽이 긴장되고 뜬금없는 시대에 버려진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너의 실험 파트너가 되겠다고 따라붙었다. 다행으로 너는 좋다 싫다 티도 나지 않게 나를 옆에 앉혀 두고 심부름을 시켰다. 플라스크를 들어줘, 저 빈칸에 39.2라고 적어, 관찰 값이 잘 나오게 실린더 사진을 찍어둬, 밑그림은 그려놨으니 현미경 보면서 나머지를 채워서 그려줘, 이제 다 끝났으니 샬레를 씻어. 실험 다음 날이면 너는 아무런 말도 이모티콘도 없이 성의 없게 찍은 실험보고서 사진을 보냈다. 너의 실험보고서를 베낄 때, 이론적 배경은 더 허술하게 쓰고 그림을 그려 넣는 부분에 불필요한 공을 들여 언제나 너보다 낮은 점수를 받도록 했다. 가령 현미경의 구조를 파악한 뒤, 몇몇 세포의 표본을 관찰하고 세포의 길이를 재는 실험의 보고서를 쓰면서 현미경 구조는 언급하지 않는 대신 쓸데없이 프레파라트만 여러 버전으로 줄기차게 그려 대는 식이었다.
“그건 하나만 그려도 돼. 지난번처럼 또 점수 깎이지 말고.”
“자꾸 움직여서 어쩔 수 없어.”
“물을 너무 많이 넣은 거 아니야? 기포 없이 잘 눌렀어? 많이 움직이면 차라리 처음부터 다시 해.”
“이게 뭐야, 유리에 기스 난 거야?”
기포가 잔뜩 들어가 지저분한 프레파라트를 내려다보면서 내가 액체를 보는 것인지 그것을 감싼 원생생물을 보고 있는 것인지 그것을 통과하던 빛을 막아낸 다른 어떤 것을 보는지 헷갈렸다. 그 사이 너는 내 실수를 수습하겠다며 양파 표피를 잘라내고 있었다. 움직이는 유체 덩어리의 투명한 구석과 반투명한 구석을 번갈아 훑는 데 꽤 재미가 들렸지만 네가 곧 못하게 할 것 같아 시시각각 변하는 상태를 최대한 빨리 받아 그렸다. 끊임없이 움직이는 물체라고 해도 여러 순간으로 잘게 쪼개서 포착하면 각 이미지는 움직임을 암시만 할 뿐 결국 고정된 순간을 표상하겠지, 그럴 수 있다면 지금 칼을 들고 어깨를 들썩이는 너의 시간도 잠시 얼려버릴 수 있겠지, 아마 운동 중인 자세로 물체를 고정한 뒤 찍은 사진과 실제로 운동 중인 사물을 순간 포착한 사진을 넌 구분할 수 없을 거야, PVC 캔버스 위에 레진으로 흐르는 유체를 구현하고 그것을 포토그램으로 찍어낸 것과 인화지에 움직이는 유체를 통과하여 밀착 인화한 것을 구별해내는 게 허망하게 어려운 것처럼. 이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 너는 한마디 말도 없이 양파 표피를 받침 유리에 올리고 물을 한 방울 떨어뜨린 뒤 덮개 유리를 덮는다.
“현미경이 빛이 통과할 수 있게 얇게 떼야 해. 물론 그 전에 껍질을 먼저 벗겨야 하지.”
가끔 잔소리 같이 들리는 너의 말은 나에게 하는 소리가 아니라 혼잣말에 가깝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지만, 습관적으로 시비를 걸고 싶어진다.
“겉이나 속이나 세포 생긴 건 똑같지 않아? 어디를 자르든 상관없잖아.”
움푹 들어간 너의 눈이 돌연 탁해지고 안 그래도 유난히 돌출된 눈썹 뼈가 치켜 들렸다.
“나에겐 상관있어.”
네가 도대체 어느 나라 사람인지 알 길이 없다고 생각해왔다. 동기들은 수도 없이 혼혈이냐 물었지만 넌 끝내 답하지 않았으니 굳이 궁금해하지 않기로 했다. 네 얼굴이 딱히 특이한 것도 아니고, 수만 년쯤 거슬러 올라가면 공동의 조상이 있을 것이며, 우리는 딱 그 정도만큼 가까울 거지. 다만 종종 너의 얼굴에 대해 사람들이 비슷한 이야기 – 남방계 미남이다, 산유국 왕자처럼 생겼다 – 를 하는 것을 보면, 다들 얼굴을 어떻게 구분해야 하는지 약속이라도 한 것 같다. 물론 내가 보기에도 어느 정도 그런 것 같지만. 하지만 너의 입술만은 우발적이다.
“입도 없으면서.”
“뭐?”
“너 입술이 없잖아. 눈이랑 코까지 잘생겨놓고 왜 입술은 녹았냐고. 그리다 지운 것처럼.”
언젠가 유전자 감식을 통해 얼마나 다양한 선조들의 피가 섞여 있는지를 밝혀내는 영상을 본 적이 있다. 참가자들은 각자의 배경을 자랑하며 특정 국가나 인종을 혐오하기도 하는데, 편지처럼 도착한 감식 결과를 확인하면 어김없이 감동의 눈물을 흘린다. 그렇게 싫어했던 부류의 피가 자신의 몸에 흐른다는 것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순수한 인종이란 없고, 우리는 모두 형제자매들이다. 유전 정보가 그런 식으로 – 32% 영국인, 16% 독일인, 10% 카리비안… – 나열될 수 있다는 게 좀 우스웠지만, 어느 정도 과학적 근거를 지니고 감동적이면서 윤리적이기까지 한 마케팅 전략에 혀를 내둘렀다. 너의 뾰족한 어깨와 소매 밖으로 엿보이는 흉터를 보며 휩싸이는 일렁임은 대체로 너를 벗겨보고 싶다는 충동으로 구체화되었는데, 그것은 너의 알몸을 보고 싶은 것이라기보다 켜켜이 쌓여 있는 유전 정보를 책처럼 한 장씩 열어보고 싶다거나 가죽과 뼈와 신경과 혈관을 생물학 교재의 삽화처럼 분리하여 한 겹씩 들여다보고 싶다는 욕망에 가까웠다. 한 장씩 빛을 쏘여볼까, 어떤 패턴으로 그을리려나, 네가 더 잘 보일까 내 시선이 너를 완전히 통과해버릴까, 그렇게 되면 너를 더 잘 갖게 되는 걸까, 쉴 새 없이 움직이는 너의 몸을 드디어 고정시켜 잡을 수 있는 걸까, 너의 기원과 변이를 추적할 수 있게 되는 걸까. 그 순간, 네가 표본을 건넨다. 너의 살에 닿지 않고 그것만 전해 받으려 하다가 결국 떨어뜨린다. 멍하니 유리 파편이 누런 타일 위에 흩어져 반짝이거나 아예 보이지 않는다. 너는 신속하게 키친타월을 둘둘 말아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넌 눈이나 제대로 뜨고 다녀. 다칠 뻔 했잖아.”
오므려진 너의 등을 보면서 너의 몸 각 부위와 층이 짓이겨져 알아볼 수 없게 된다면, 그런 너를 바라보지 못하고 통과해서 그 뒤의 것을 보는 지경에 이른다면 나는 그래도 너의 실험 파트너일 수 있을지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