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기획자와 그래픽디자이너, 갈 때까지 가는 사이
『시간, 장소, 전시 포스터』, 2021
우리는 결국 서로를 미워하게 될 거야
소셜네트워크를 통해 전시 소식을 접하는 시대에 전시 아이덴티티는 정보 전달 이상의 역할을 수행한다. 특히 인스타그램이 주요 홍보 플랫폼이 되면서 정사각형(가로형은 4:3, 세로형은 4:5를 사용하기도 한다)의 이미지로 강렬한 임팩트를 주고, 주요 정보는 텍스트란으로 빼는 것이 홍보물의 기본 모듈이 되었다. 포스터나 초대장을 우편으로 전송하고, 수신자가 이를 더듬어보며 오프닝 날짜와 장소를 체크하는 일은 철 지난 관습이 되었다. 이제 포스터는 보는 이의 인식과 기억을 특정한 방향으로 유도하는 매체로서, 정보가 아닌 태도를 소통한다. 웹포스터가 프로젝트를 평가하는 중요한 기준으로 설정하거나, 이를 통해 전시를 예상하거나 기억하는 것도 이상할 일이 없다.
특기할 점은 전시나 프로젝트를 직접 접하기도 전에 먼저 만나게 되는 이미지가 많은 경우 그것이 ‘홍보’ 혹은 ‘대리’하는 본 프로젝트와 필연적인 연관성이 없어 보인다는 것이다. 해외 미술관 홈페이지는 작품 사진을 썸네일로 활용하고, 국제 미술 행사 홍보의 독과점 플랫폼이나 마찬가지인 e-flux에서도 원칙적으로 정보가 기재된 포스터를 업로드할 수 없도록 되어 있는 점을 감안하면, 이는 서울 미술계의 독특한 양상으로 보인다. 이곳에서는 국공립기관 및 주요 사립미술공간과 그 바깥의 영역 모두를 아울러 작품이나 전시 전경 사진이 아니라 그래픽 디자인 이미지를 전면에 내세운다.
미술 프로젝트에서 그래픽 디자인이 보이는 강세는 미술 기획이 단일한 작품 혹은 작가(혹은 작가의 합)를 초과한 아이덴티티를 가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함축한다. 그래픽 디자인이 점유하는 독특한 역할로 인해 업계 종사자는 물론 국내 관객이 시각커뮤니케이션에 예민하게 반응하게 된 것도 체감한다. 수단을 넘어 그 자체로 하나의 스테이트먼트가 된 이 시각적 양태는 기획자와 디자이너의 입장에서는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는 반가운 영역이다. 하지만 실상 마주하게 되는 것은 전시가 궁극적으로 보여주고자 하는 바와 상관이 없어 보이는 이미지로 가득한 피드다. 이러한 간극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멀리서 보면 흥미로운 이 현상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다. 기획자마다 예상한 것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는 디자인을 보며 당혹스러웠던 경험이 있었을테고, 디자이너는 기획자의 끊임없는 수정사항과 모호한 언변 덕에 포기 직전까지 갔던 악몽에 익숙할 것이다. 기획자는 이전 작업을 꼼꼼히 살펴보고 디자이너를 선택했을 것이고, 디자이너 역시 기획과 과업을 확인하고 수락했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업무가 끝난 후, 쓴 마음 한 점 없이 함께 웃으며 인사할 수 있는 기획자와 디자이너는 얼마나 될까?
‘나쁜 기획자’, ‘나쁜 디자이너’는 없다(고 믿고 싶다). 이 글에서는 기획자가 그리는 그림과 그래픽디자이너가 생산하는 결과물 사이에 발생하는 간극에 대해 독립기획자로서 경험을 바탕으로 두 가지 가설과 각각에 대한 완충 장치, 그리고 이상적인 소통을 위한 접근을 살펴보려 한다.
텅 빈 냉장고 가설
2014년부터 2019년까지 JTBC에서 방영한 ‘냉장고를 부탁해’는 출연진의 집에서 냉장고를 통째로 꺼내와 그 속을 살펴보고, 거기서 나온 재료로 가지고 정상급 쉐프가 15분만에 최상의 요리를 선보이는 프로그램으로 인기를 끌었다. 냉장고의 속사정은 생활 습관이나 취향을 증언해주게 마련이니 이야기거리를 뽑아내기도 적합하고, 쉐프의 순발력과 기발한 아이디어를 보는 재미도 있다. 하지만 본격적인 관전 포인트는 간혹 등장하는 텅 빈 냉장고에 있다. 평소에 요리를 하지 않는다며 민망해하는 출연자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는 셰프들. 냉동실 구석에서 찾아낸 고기 쪼가리와 기어코 찾아낸 소스 몇 가지를 배합해서 훌륭한 디쉬를 선보이는 퍼포먼스. 나도 이제는 요리에 관심을 가져야겠다며 감탄하는 게스트까지. 역시 위기는 극적인 전개를 위한 도움닫기에 불과하다.
기획자가 그래픽디자이너에게 전시 아이덴티티를 의뢰할 때, 전시의 구조, 지배적인 색이나 형태, 작품 이미지 등 시각데이터가 전혀 없는 경우가 왕왕 있다. 이러한 결핍은 디자이너를 신뢰하고 그에게 높은 자유도를 허락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지만 수많은 커뮤니케이션 실패과 오해를 낳는 시작점이기도 하다. 기획자의 입장에서 변명하자면, 문화예술기금 선정자 발표는 속절없이 늦어지고, 대관과 일정 조정이 쉽지 않은 데다가 서문을 작성할 때까지도 신작을 구경도 하지 못하는 일이 잦을 뿐, 부러 디자이너를 곤란하게 하려는 의도는 없다. 모든 것이 결정될 때까지 하염없이 기다리다가는 함께 일하고 싶은 디자이너를 확보하지 못할 수도 있으니, 우선은 연락을 취해보는 것이다. 이로써 디자이너는 빈약한 냉장고를 더듬어가며 부스러기라도 긁어 모아야한다. 세프는 억울할 따름이다.
디자이너의 독해력은 모범답안이 없는 시험대에 오른다. 감각의 차원으로 구체화되지 않은 맥락과 개념을 바탕으로 아무도 가보지 못한 풍경과 발생하지 않은 사건의 지도를 그려야만 한다. 경험에 미뤄볼 때, 도움이 되었던 것은 러프한 시안이다. 주어진 맥락에서 어떤 꼭지를 중점적으로 해석할 것이며, 그 해석의 방향성과 주된 모티프로 작동할 그래픽 요소는 무엇인지를 제안하는 것이다. 디테일까지 꽉 들어찬 ‘시안’은 오히려 피드백을 할 여지가 없고, 서로의 오해가 깊어지는 부작용을 낳는다. 오히려 초반에 소통한 내용을 가지고 직관적으로 접근해 출력된 2개 이상의 느슨한 스케치는 함께 선택하고 구체화해가는 과정을 가능하게 한다.
욕망충돌설 – 누가 무엇을 얻어갈 것인가?
냉장고가 적당히 채워져 있었다면 훨씬 수월할까? 상상과 현실의 오차를 줄여보고자 기획자가 기획안, 참여작가의 포트폴리오나 작업 사진, 해당 디자이너의 과거 작업 중 원하는 디자인에 가까운 것, 레퍼런스 이미지 등 성실하게 준비하여 먼저 제시한다면 어떨까? 하지만 그 많은 자료가 디자이너를 오히려 엉뚱한 곳으로 인도할 것이다. 기획자는 전혀 예상치 못한 시안을 받게 될 것이다. 여전한 간극의 문제는 경험의 차이와 언어 장벽의 몫도 있다. 글자를 “조금만” 크게, 톤을 “적당히” 어둡게, 느낌을 “선명하게” 해달라는 기획자의 요청이 무척 추상적인 한편 그래픽 디자이너는 이종이의 재질은 “빤딱빤딱”하고 색이 “잘 먹는다”며 기획자는 본 적이 없는 것에 대해 당연하다는 듯 묘사하곤 한다. 갖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발생하는 소통의 문제는 불가하다. 관건은 크고 작은 갈등과 조정의 수고로움을 견뎌내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먼저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기획자와 디자이너가 서로 무엇을 얻어갈 것인지에 대한 상호이해다.
기획자와 그래픽디자이너는 서로 다른 입장으로 인해 줄 수 있는 것이 다르기 때문에 상호 교환의 관점에서 협업이 시작되며 심지어 우정이 싹트기도 한다. 기획자는 디자이너에게 다음과 같은 것을 주거나 주지 못한다: 사례비, 크레딧, 작업물을 보여줄 지면 혹은 플랫폼, ‘좋은’ 프로젝트에 참여했다는 만족감, ‘좋은’ 협업자와 일하는 즐거움. 이 다섯 가지 중 단 하나라도 충족되지 않는다면, 애초에 관계가 성립되지 않을 것이다. 모든 것을 갖춘 경우는 드물고, 디자이너마다 각 요소에 부여하는 무게가 다를 것이다. 가령, 예산이 넉넉하게 책정되어 있고, 참여가 곧 경력이 될 수 있는 대규모 프로젝트의 경우, 작업물에 간섭이 많고, 과업이 수시로 추가되면서 일정은 조정이 되지 않는 경우가 대다수다. 이러한 경우에는 전자, 즉 두둑한 사례비와 이력서에 올라갈 한 줄을 위해 어느 정도까지는 참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반대의 경우는 어떨까? 금전적, 상징적 보상이 예상되지 않을 때, 디자이너는 적어도 간섭 없이 매끄럽게 진행되기를 내심 기대하고 기획자는 미안한 마음에 정당한 수정 요청조차 망설이게 된다. 하지만 문제는 이처럼 간단하게 – 보상은 크지만 귀찮게 구는 일 vs. 보상은 적지만 존중 받는 일 – 나뉘지 않는다는 것이다.
보상과 업무에 대한 기준이 서로 다르고, 미술 분야에서는 구조적으로 양측이 모두 행복한 지점을 찾기는 무척 어렵다. 미술계는 디자인을 전면에 내세우는 한편 사업 규모의 한계 때문에 디자이너의 인건비는 비교적 낮게 책정되는 경향이 있다. 때문에 미술 관련 프로젝트는 디자이너에게 일종의 패션 프로젝트(passion project, 혹은 열정 사업)가 되기도 한다. 한편, 기획자는 디자이너 사례비가 작품을 만들고 전시하는 작가의 사례비보다 많다는 모순을 마주한다. 나아가 사례비가 책정된다 해도 계약서에 정확한 과업과 수정가능 횟수, 사례비와 지급 시기가 명시하는 경우가 드물고, 반대로 디자이너마다 제시하는 시안의 개수, 수정의 여지, 추가 과업 수락 여부가 천차만별로 다르다.
흔하고 위태로운 조합은 전체 예산에 비해 꽤 큰 비중을 디자이너 사례비로 책정하여 ‘줄만큼 줬다’는 생각에 스스로를 철저히 클라이언트로서 정체화한 기획자와 사례비가 애매하고 일정이 타이트하지만 ‘재미있는’ 프로젝트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수락한 디자이너다. 기획자는 디자이너를 자신의 비전을 펼치기 위해 디자이너를 고용했다 생각하며 서비스를 기대하고, 디자이너는 미술 프로젝트 특유의 유연함에 기대어 자신의 아이디어나 평소에 해보고 싶었던 것을 시도할 수 있는 계기로 삼으려 하는 것이다. 더 극단으로 향하면, 기획자에게 디자이너는 자신의 마음에 들 때까지 서비스를 제공해야 하는 업체에 불과하고, 디자이너에게 기획자는 자신의 비전을 이해하고 이를 펼칠 수 있도록 군말없이 자원을 조달해야 하는 물주다. 이러한 태도의 간극은 소통과 조정의 과정 전반을 오염시킨다. 이러한 극단으로 가지 않기 위해서는 상호신뢰를 바탕으로 기대치에 대한 다소 불편한 대화를 감수하는 수밖에 없다.
갈 때까지 가기 위해서
기획자와 디자이너의 소통은 서로의 격차를 좁혀나가기 위한 수단이라기보다 함께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가늠해보는 과정이다. ‘격차 좁히기’가 서로 줄다리기를 하며 한쪽이 다른 쪽으로 더 가까이 넘어가는 제로섬 게임에 가깝다면, ‘갈 때까지 가기’는 각자가 예상했던 것을 넘어서는 결과물로 함께 향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좋은 디자이너를 많이 만나 갈 때까지 가는 경험을 했는데, 그때마다 아슬아슬한 갈등을 겪기도 하고, 예상치 못하게 훌륭한 결과물에 오히려 자극을 받기도 했다. 가장 최근 경험을 들어 기획자와 디자이너가 함께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살펴보자.
올해 4월에 열린 기획전 《그래비티 샤워》의 아이덴티티를 만들기 위해 이현송 디자이너에게 의뢰하면서 다음과 같은 요청사항을 전달했다. 1) 프로젝트 타이틀인 “그래비티 샤워(Gravity Shower)”라는 문구가 두드러지도록 배치하고, 그것이 강조되는 서체를 선택할 것, 2) 이후에 출간할 출판물로 연장될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둘 것(포스터가 마치 책 표지처럼 보일 수 있도록), 3) 기획의 중점이 된 심상(발자취, 도로, 컨테이너, 공간을 펼친 평면도, 신체와 밀착한 기계 등)을 고려할 것, 4) 낡은 과학 서적 레퍼런스를 참고할 것. 이와 더불어 참여작가의 작품 사진 및 포트폴리오를 전달했다. 이를 바탕으로 이현송 디자이너는 두 가지 시안을 제안했다.
두 시안의 지향성은 명확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첫 번째는 파스텔톤의 색 조합과 서체가 고전적이면서 그 자체로 출판물의 표지가 될 수 있어 요청 사항을 두루 충족하고 있었지만, 두 번째 시안이 주는 명쾌함이 이 프로젝트에 더 맞다고 판단되었다. 하지만 이 시안을 보고, 세 번째 요구사항, 즉 전시의 중점적인 심상 및 개념에 대한 소통이 불충분했고, 네 번째 요청사항은 오히려 방해가 되었다는 것을 확인했다. 이에 두 번째 시안을 바탕으로 다음과 같은 피드백을 고려하여 더 디벨롭해줄 것을 요청했다. 1) 색상 변경: 이전에 여성성 및 여성의 재현을 다룬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핑크를 자주 사용했던터라 다른 컬러, 특히 지난 토크 프로그램 포스터에서 사용했던 라임 컬러를 사용해보면 어떨지 (물론 이외에 고려했던 컬러가 있다면, 시도해주시길), 2) 컨셉 심화: 일곱 개의 선의 시각적 효과가 좋지만, 기획에서 다루고자 하는 ‘중력’과 맞지 않으니 굴절이나 왜곡을 주어 패턴을 만들어 보기.
두 번째 피드백을 부연하기 위해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 이론이 제시하는 중력 개념을 형상화 한 이미지를 첨부했다. 이 프로젝트가 중력이라는 메타포를 통해 담고자 했던 내용은 일직선 방향으로 표현되는 힘이 아니라 무게로 인해 휘어지는 시공간이었기 때문에 선을 더 과감하게 써 볼 것을 제안했다.
결과물로 이현송 디자이너가 제안한 이미지는 다음과 같다.
두 번째 시안에서 이현송 디자이너가 첫 번째 피드백은 충실히 적용했고, 두 번째 피드백을 반영하되 레퍼런스 이미지를 그대로 사용하기보다 곡선으로 휘어 보이는 면을 만들고 노이즈를 도입하는 접근을 통해 내가 예상하지 못했던 이미지를 보여주었다. 여기서 맨 처음 제시했던 요청사항이 얼마나 추상적이었는지 재차 확인하게 되었고, 구체적인 피드백이 얼마나 더 멀리 갈 수 있는지를 보게 되었다. 이 과정과 최종 시안을 통해 좋은 자극을 받아 기획 중 모호했던 부분을 다듬게 되기도 했다.
기획자와 디자이너의 이상적인 만남은 갈등의 부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서로를 긴장할 수 있도록 하는 정확한 피드백과 자신의 언어와 색깔을 타협하지 않고 과감하게 보여주는 것에 있다. 갈 때까지 가는 기획자와 디자이너의 결과물은 각각의 예상 범주를 벗어난 곳으로 우리를 데려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