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찾던 얼굴, 나타난 얼굴
Stranger than Paradise展 10. 31~11. 24
아트스페이스보안 윤석남展 11. 7~12. 21 OCI미술관
아트인컬처 2019년 12월호
1994년부터 16년간 방영된 국민 프로그램 “TV는 사랑을 싣고”는 유명인 게스트가 그리워하는 친구, 첫사랑, 선생님, 이웃 등을 찾아주었다. 각별한 만남과 속절없는 이별의 사연, 그리고 최소한의 단서를 가지고 어떤 사람을 찾는 제작진의 우여곡절은 시청자로 하여금 간절한 마음에 동참하도록 한다. 단절의 시간이 길수록, 추적의 과정이 힘겨울수록 긴장감은 고조된다. 그 사람 결국 찾았을까? 그 또한 마찬가지로 보고싶다며 흔쾌히 스튜디오에 나왔을까? 간절한 마음으로 닫힌 문을 향해 외친다. ○○야! ○○ 언니! ○○ 선생님! 세 번쯤 목놓아 불러야 배경음악 “The Power of Love”와 함께 문이 열리고, 보고픈 얼굴이 그 사이로 저벅저벅 걸어나온다. 재회의 현장은 대체로 벅찬 감동의 도가니다.
그런데 사람 찾는 일에 이골이 나버린 제작진이 얼추 비슷하게 생긴 단역 배우를 훈련시켜 그 문을 통과시키면 어떻게 될까? 과연 출연자는 가짜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을까? 막상 세트장에 등장한 사람은 첫 방송 출연에 긴장한 듯 쭈뼛하지만, 출연자는 이전의 모습을 찾아보기 어려운 얼굴 앞에서 연신 눈물을 쏟는다. 어떻게 출연자는 보고 싶은 사람이 그토록 분명할까? 이전에 알던 사람과 전혀 다른 얼굴이 등장했는데 어떻게 순식간에 감격할 수 있을까? 모두들 꼭 보아야만 하는 얼굴을 하나씩 품고 사는 걸까? 기어코 그 얼굴을 마주치고야 말았을 때 어떤 일이 생길까? 기다리던 바로 그 얼굴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Stranger than Paradise》가 열린 보안여관 구관의 입구 양옆에 난 유리창으로부터 얼굴이, 그리고 그 시선이 뚫고 나온다. 주황의 사진 <Broadway>(1996)와 이제의 유화 <달밤>(2019)이다. 습관처럼 들이댄 스마트폰 카메라는 단번에 얼굴을 인식하여 신속하게 노란색 네모 칸을 띄운다. 그것이 무엇이었는지를 말할 겨를도 없이, 이 두 작가의 서로 다른 매체 및 접근이나 두 작업 간의 시차에 대한 생각이 미치기도 전에 창과 작품의 이중 프레임을 투과하여 어떤 인물이 이미 다가와 있다. 이 전시는 90년대 미국에서 주황이 촬영한 인물 사진과 이제가 중국, 러시아, 북한의 국경 지역을 육로로 여행한 뒤 그린 유화를 병치하여 제시한다. 구관 두 층에서는 헐벗은 기둥과 앙상한 구조물이 만들어낸 구획을 경유해서만 이 이미지를 마주할 수 있다. 때문에 각 작업이 드러내는 풍경과 인물에 밀착할 기회는 좀처럼 주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이러한 물리적인 제약으로 인해 몇 겹의 프레임을 통과하고도 여전히 긴장을 유지하는 주황의 사진과 불투명한 색의 두께로부터 형상을 꺼내는 이제의 그림을 만날 때 일어나는 일을 유심히 관찰할 수 있다.
최소한의 단서만을 갖고 떠난 탐사의 황망함이 이제의 유화가 드러내는 풍경을 관통한다. 풍경 속 형상은 스스로를 주장하여 드러내기보다 주변의 공기에 충분히 녹아있다. 버스나 자동차와 같은 이동 수단은 안개 사이로 겨우 희미하게 보일 뿐이고, 강은 탁하고 한적하며, 황량한 벌판에 앉아있는 독수리는 땅이나 나무에 심겨져 있다. 작가가 두 발로 직접 맞댄 두만강 하류의 훈춘은 역사적 갈등의 무게를 체현하기보다 ‘볼 것 없음’과 궂은 날씨로 대답한다. 유화 특유의 불투명하고 두터운 면, 그리고 그 위에 스치듯 올라간 물감의 길은 잡히지 않는 경계와 보이지 않는 얼굴을 거듭 만지고, 물러서고, 다시 잡기를 반복한 시간을 가늠하게 한다. 하지만 이는 망설임이나 알 수 없음으로 환원되기보다 구체적이고 집중도 있는 화면으로 귀결된다. 따라서 풍경을 담은 유화는 형상이 비교적 선명한 형상이나 인물이 등장하는 작업에 대한 예비적인 역할을 하지는 않는다. 다시 말해, 그의 캔버스 위에서 풍경과 사람은 선후 관계나 원인과 결과, 전경과 후경의 위계로 정리되지 않는다. <우리의 춤은 늘 뜻밖에 찾아오지>에서 산란하는 빛 사이로 드러나는 춤추는 몸은 각각이 개체로서 영역을 얻기보다 덩어리져 있고, 붉은 땅과 푸른 공기와 엉겨있다. 한창 흙이나 반죽을 치대다가 뭉긋하게 돌출되어 모양이 나타난 것처럼, 유화 속 형상은 아직 형틀로 찍어내기 이전의 질료 상태에 머문다. 여정은 계속되고 형상은 상승과 하강을 반복한다.
한편 주황의 사진은 한 프레임에 상반신만 들어간 것, 공원이나 거리에 서 있거나 생활공간에 있는 것, 카메라를 응시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 등 구도나 연출에는 차이가 있지만 선명한 여성의 초상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20년도 더 지난 뉴욕에서 찍은 사진을 관통하는 또 다른 공통분모는 묘사하기가 유난히 불편하다는 점이다. 물론 피사체가 여성이거나 그렇게 보이기 때문에 여성을 말하지 않고는 이미지를 말하기 어렵다는 점도 한몫한다. 하지만 주목해야 할 것은 주황의 사진이 한 개인으로서 존재할 수 있는 거리를 허락하는 동시에 각 인물을 환원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여지를 지우지 않는다는 점이다. 가령 <Astor Place>(1996)을 비롯하여 나란히 설치된 세 상반신 사진은 언뜻 보면 정중앙에 배치된 인물이 카메라를 정확하게 응시하고 있기 때문에 개별적인 존재를 그대로 투과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자세히 뜯어보면 인물 뒤로 엿보이는 배경, 의복, 화장, 머리 스타일과 표정으로부터 나이, 특정한 시대와 장소, 문화권, 취향, 사회경제적 위치 등을 습관적으로 읽어내게 된다. 해석으로부터 드러나고 말 무딘 언어습관과 편견을 배제하고자 가장 단순한 묘사에 머문다 해도 어려운 것은 여전하다. “엄마와 아기가 집에 있다”, “여자가 속옷 바람으로 고양이를 안고 있다”, “젊은 여자가 노래방에서 마이크를 들고 있다”는 문장은 어쩐지 사진과 전혀 상관없는 말 같다. 이로써 얼굴들은 순식간에 다가왔다가 조금씩 물러선다. 그리고는 무엇이 보이는지, 그리고 그것을 그렇게 볼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인지 물으며 보는 이의 위치를 노출할 수밖에 없도록 힘을 발휘한다.
윤석남의 “벗들의 초상”은 작가의 여성 동료 스물두 명을 그려낸 초상화 연작으로, 각 작품의 제목은 주인공의 이름이라서 얼굴을 찾고, 만나고, 앞으로 내세우는 과정이 보다 투명하고 직설적으로 드러난다. 일련의 초상화는 채색화의 특징, 즉 최소한의 음영, 선명한 경계선과 채색을 통해 발생한 생략과 강조의 효과가 두드러진다. 각 초상화는 각 인물의 업적과 개성을 압축하여 드러내도록 연출된 배경과 더불어 특징을 절묘하게 포착한 얼굴이 있다. 동양화 특유의 평등한 화면에서 각 인물은 배경을 뒤로하기보다 그가 속한 세계와 더불어 나아온다. 저술가의 등 뒤로 배치된 책꽂이는 꽂힌 책의 제목을 읽어낼 수 있을 정도로 상세하게 묘사되었고, 화가의 곁에는 그가 그린 그림까지 재현해두었다. 작가는 각 초상화에 인물을 만났던 경위와 함께 보낸 시간, 개인적인 소회를 담은 글을 한 도막씩 썼다. 각 글은 동료에게 남겨둔 쪽지에 적을만한 말로 마무리한다. “우리 오래도록 붓을 놓지 말자꾸나,”(정정엽) “힘이 닿는 대로 열심히 할게요.”(김홍희) “서울 오면 연락 줘요.”(류준하) 자신과의 관계를 바탕으로 작가가 그려낸 동료에는 김인순, 정정엽, 김홍희, 김현주, 박영숙 등 한국 여성주의 미술의 주요 인물은 물론 이외에도 문화예술계 및 학계의 인사를 포함된다. 보고싶고 고마운 마음으로 연결된 인물은 곧 작업 세계 전반의 자양분이자 도약의 배경이기도 한 것이다. 1, 2층을 가득 채운 초상화를 본 뒤 3층으로 올라가면 작가의 자화상이 펼쳐진다. 전시장 전체가 한 폭의 작품이라면, 동료의 초상화를 배경으로 삼아 작가의 얼굴이 드러날 것이다. 한편으로 초상 연작은 넓은 의미에서 작가의 자화상이며, 다른 한편으로 이 자화상은 여러 목소리의 간섭과 개입을 재료로 하며 관계에 의해 지탱된다.
풍경과 인물, 원경과 근경의 구분을 두지 않는 이제는 무언가를 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국경을 따라 이동하면서 막연함 속에서 솟아오르는 것을 구체적으로 붙잡는다. 주황은 자신이 “아시안 여성”으로 규정되는 것을 피부로 느끼던 유학 시절, 길에서 마주친 또래의 아시안 여성의 얼굴이 순간 줌-인되어 강렬하게 다가오는 것을 경험한 후 근접 초상 사진을 찍었다. 한국화 및 근대회화의 역사에서 지워진 여성의 얼굴을 기입해야 할 필요에서부터 주변 인물의 초상을 그렸다는 윤석남은 동료의 초상을 앞세워 자신의 얼굴을 재구성한다. 얼굴이 나타나는 것, 그리고 그 나타남이 유발하는 일종의 엮임은 형이상학적인 것이 아니라 편파적인 것이다. 어떤 얼굴이 “드러났다”는 주장은 누군가 그 얼굴을 찾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 얼굴이 탐색에 응하여 나타나 주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검색 엔진과 소셜미디어 등 얼굴을 찾아볼 수 있는 경로가 개발된 이래로 “TV는 사랑을 싣고”의 감동은 반감되었고, 2010년 5월 종영했다. 하지만 우리는 제대로 그려볼 수조차 없는 보고싶은 얼굴, 나의 세계를 흔드는 얼굴, 나를 닮은 얼굴을 찾아나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