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롤모델의 마이크로 토폴로지와 초과잉-나르시시스트의 굉음

zineseminar issue 06, 2021

일부 남성이 특수한 맥락에서 나르시시스트라는 비난을 받을 때, 모든 여성은 어느 정도 나르시시스트라는 혐의에 시달린다. 가정에 소홀한, 외모에 집착하는, 자신의 권리를 과하게 주장하는, 버릇없는 ‘나르시시스트’는 여성의 사회 진출과 성취 욕구를 압박하기 위한 백래시의 논리로 사용되는 한편, ‘해방된’ ‘독립적인’ 여성을 찬양하며 립스틱 하나라도 더 팔아보려는 광고주가 즐겨 찾는 여성상이기도 하다. 프로이트가 “아름다운 여성”을 콕 집어 대상애로 이행하지 못하고 자신만을 사랑하는 나르시시스트라고 비난한 이래로 전략적으로 변주해온 나르시시즘에 대해 취할 수 있는 태도는 크게 두 갈래다. 나르시시즘에 대한 프로이트의 분석에 유감을 표하거나 여성의 자기애를 맥락화 하여 동력으로 삼거나.

시몬 드 보부아르는 여성이 남성에 의한 객체화 경험을 내재하게 된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후자의 물꼬를 튼다. 시선의 주체이자 대상으로 분열된 여성이 사회적으로 성취를 이룰 수 없을 때, 반사된 자신의 이미지와 동일시하고 나아가 이를 통해 자기 숭배의 쾌를 누린다는 것이다. 이후에도 산드라 리 바트키 등이 보부아르의 논의를 현대적 의미에서 재해석하며, 분열된 여성 자아가 규범적 ‘아름다움’과 협상하거나 갈등하는 내재화의 기제에 주목했다. 이러한 논의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여성의 나르시시즘이 사회적 자장 속에서 만들어진 이상향에 의해 굴절된 것으로, 자기애는 불가피하게 대상애를 내포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여성은 언제라도 나르시시스트였던 적이 없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모젠 타일러는 "우세한 나르시시즘의 종류를 폭로하고 여성들 간의 새로운 의식적인 나르시시즘의 형태를 독려하는" 나르시시즘 정치가 곧 페미니즘적 실천이라고 주장한다. 시스젠더 헤테로 남성의 허울 뿐인 자신감과 동료 남성에 대한 끔찍한 충성과 같은 지극히 ‘평범한’ 행태를 남성적 나르시시즘으로 지적하고, 사회문화적 이상향과 갈등하며 빚어낸 각양각색의 여성적 나르시시즘을 발굴해냄으로써 여성의 정체성, 자존감, 바디이미지, 정상성, 행위자성 등의 논의로 나아가자는 것이다.[1]

여성적 나르시시즘이 규범의 내면화와 타자의 기입으로 정의될 수 있다면, 바로 그 규범과 타자가 현시되는 매체와 그 작동에 따라 나르시시즘의 기전도 분화할 것이다. 고도로 발달한 소비주의-자본주의와 소셜미디어의 출현을 배경으로 한 나르시시즘의 국면은 근대 도시 형성기에 드러난 모순을 변주하여 반복하고 있다. 1920년대 식민지 조선의 근대 도시 경성에 등장한 ‘모던걸’은 공적 공간에 여성이 등장했음을 알렸다. 모던걸은 스펙터클의 일부로써 시선의 대상인 동시에 소비를 통해 자신의 자리를 확보한 근대사회의 행위자였다. 당시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 주요 매체의 사설, 연재 만화 및 소설은 입을 모아 짧은 머리에 서양식 차림으로 백화점을 드나들던 여성을 적나라하게 묘사하는 동시에 단죄했다. 여성의 소비는 기생적이고(그녀들의 돈이 어디에서 났나?), 취향은 타락했으며(홀랑 양 것을 배워 미풍양속을 헤친다!), 몸가짐은 불량했다(낭비벽이 심한 여성이라면 남자를 갈아치우며 사귈 것이다).[2] 근대 도시의 시각장은 여성이 스스로의 이미지를 연출함으로써 근대 사회의 행위자로 공적 공간에 진입할 경로를 제공했지만, 바로 그 경로를 통해 규범적 시선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100여 년이 지난 지금, 도심 속 편재하는 여성의 이미지는 거의 언제나 무엇을 팔거나 사고 있으며, 여성의 사회 일원으로서의 권한과 자아 형성은 모던걸에게 그랬던 것처럼 많은 부분 소비에 기대고 있다. 미디어는 어떤 여성이 재현될 가치가 있는지 판단하고, 틀에 맞지 않은 여성을 응징함으로써 본보기 삼는다. 이처럼 유해한 소비-나르시시즘의 국면은 ‘잇걸’이 돌연 탄생했다가 스캔들이나 노화로 퇴장하기를 반복하는 동안 규범적 이상향이라는 환상을 부지런히 유지한 것처럼 보인다.

물론 이처럼 단순한 서술에는 오류가 있다. 사실 일상을 사는 많은 여성들은 저마다의 삶을 살 뿐, 유행이나 규범적 이미지를 의식적으로, 성실하게 따르지 않는다. 잡티 하나 없고 늙지 않는 맑은 피부에 비현실적인 비율의 젊은 여자들을 온종일 쳐다본들 뭘 어쩔 것인가? 물론 이러한 괴리가 남기는 내상을 쉬이 간과할 수는 없으나, 화장품 광고에 유명 배우가 나와 광채를 뿜어대고 무얼 입었더니 남자들이 다 쳐다봤더라 한들 그것이 현실과 거리가 멀다는 것쯤은 이미 잘 알고 있다. 모두가 몇 개 안되는 채널을 보던 때의 유행은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행위자로부터 출발하고, 한번 대중 사이에 스며들기 시작한 이상 그 누구라도 참여하지 않기 어려운 것이었다. 달리 말하자면, 일방적 송수신을 전제로 한 대중미디어 지형에서 유행이란 누구든 알아볼 수 있는 강력한 흐름이지만, 동시에 아예 관심을 끄고 살아도 무방한 배경에 불과했다.

근 몇 년 안에 소셜미디어가 몰고온 지각변동은 소녀시대가 각양각색의 스키니진을 입고 나온다고 굳이 꽉 끼는 흰 데님을 입을 생각이 애초에 없었던, 시청률 30%를 육박하는 TV 드라마의 여주인공이 착용한 헤어밴드가 유행하는 줄도 모르고 우연히 사서 별 생각없이 쓰던 이들을 포섭했다는 점에서 특기할 만하다. 온라인 커뮤니티와 소셜미디어의 활성화가 가동하는 인플루언서 모델은 ‘나’처럼 생긴 사람이 마치 ‘나’의 친구처럼 다가와 내가 도전해볼만한 이상향을 제시해주는 강력한 준사회적 관계(para-social interaction)을 기반으로 한다. 조효진, 유트루, 회사원, 윤짜미, 홀리 등 ‘뷰티’ 유튜버는 굳이 아이돌이나 배우처럼 뷰티풀할 필요가 없으며, 오히려 외모 콤플렉스는 팔로어와 더 강력한 연대를 결성하도록 돕는다. 최근 제품 협찬이나 광고를 표기하도록 하여 혼선이 감소했으나, 이들이 입고, 먹고, 바르는 제품은 저 먼 세계의 스타가 돈 받고 얼굴만 빌려준 상품이 아니라 ‘아는 언니’가 ‘직접’ 사용해보고 적극 추천해주는 아이템으로 둔갑한다. 인스타그램 팔로어 67만의 문제적인 사업가 ‘임블리’를 비롯한 수많은 인플루언서는 의류, 화장품, 생활용품, 건강식 등 분야를 넘나들며 사업을 벌이고, 주요 명품 브랜드의 뮤즈로 활동하며, 팬 사인회를 하는 등 충성스러운 팬층을 거느린다.

다른 한편, 케이팝 산업이 포화되면서 ‘프로듀스 101’을 필두로 일반인이 아닌 연습생을 대상으로 한 오디션 프로그램이 성행하고, V-라이브 등 밀착소통형 팬 서비스를 경쟁적으로 유치하면서[3] 연예인은 더 이상 범접할 수 없는 우상이 아니라 특수 서비스 제공자로 재조정된다. 숭배와 질투를 받아 마땅한 케이팝 아이돌은 ‘엄마, 꽃길만 걷게 해드릴게요’로 대변되는 통속적인 내러티브를 덧입고, 무대 뒤에서 때로는 초조하게 평가를 기다리고 때로는 치열하게 경쟁하는 ‘인간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탈신비화된 공인은 방송사나 프로듀서의 매개 없이 숙소나 이동 차량, 대기실과 같이 보다 사적인 공간에서의 더 ‘리얼’한 모습을 노출시키며 소통-노동을 지속한다. 일방적인 브로드캐스팅 구조가 무너지면서 현역 걸그룹의 멤버까지 유튜버로 ‘데뷔’하는 역전 현상이 일어나기도 하는데, 소속사의 전폭적인 지원에도 불구하고 탑티어 ‘일반인’ 유튜버의 팔로어 수를 도저히 따라잡지 못한다.

마이크로 인플루언서의 부상과 스타 입지의 훼손은 일견 ‘전복적’인 현상으로 보일지 모른다. 우리의 스타들이 하늘에서 땅으로 가까이 내려올수록 상대적으로 땅은 하늘로 올라 붙어보이는 착시를 일으키며, ‘경계가 흐려지는’ 성취로 읽힐 수 있다. 하지만 세분화된 롤모델의 토폴로지 위에서 검토해야 할 패착은 모두가 저만의 셀렙이 될 수 있는 경로가 개척되었고, 고로 그 길을 걸어야만 하는 상황이다. 모던걸이 근대적 스펙터클의 한복판에 뛰어듦으로써 자신의 자리를 확보했듯 관심 경제 및 이미지 정치의 국면에서 여성은 스스로의 개성과 아름다움을 개발하여, 전시하고 마케팅하는 과제를 수행함으로써 자아를 발견하는 모순을 마주하는 것이다.

(물론 아직 갈 길이 멀지만) 요즘 대중미디어는 송은이 사단과 ‘연반인’ 재재, ‘운동뚱’ 김민경의 부상이 예증하듯 예쁜 여자와 못 생긴 여자, 착한 여자와 못된 여자의 구도를 벗어나 더 다채로운 스펙트럼의 여성을 재현한다. 물론 비교적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인물(상)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한줌의 청춘 스타가 시대를 주름잡고, 충무로발 애국 영화가 천만관객을 달성하거나 단 하나의 곡이 몇 달간 가요프로그램에서 1위를 차지하며 국민가요 반열에 오르는 일은 더 이상 상상하기 어려운 판이 됐다. 심지어 중소 기획사 소속 아이돌 그룹을 중심으로 젠더뉴트럴 착장과 퀴어베이팅를 필살기처럼 쓰는 것을 보면, 케이팝은 지구상 마지막 한 사람이 자신만의 ‘최애’를 품은 ‘애미’가 될 때까지 영원히 팽창하도록 프로그래밍된 게 틀림없다. 이러한 모델의 다변화가 나르시시즘 정치에 던져주는 난제는 다양한 모델이 상품화 및 유형화 기제에 포섭된다는 점이다.

소비-자본주의는 대중에 선택의 폭을 넓힘으로써 진화해왔다. 단순한 예시로, 브리트니 스피어스가 ‘팝 프린세스’로 부상한 90년대 후반에 이어 2000년대 초반 ‘펑크 프린세스’ 에이브릴 라빈이 등장하여 (실제로는 두 스타가 서로 우호적이었다고 하지만) 안티-브리트니의 역할을 적절히 수행해주었던 것을 생각해볼 수 있다.[4] 에이브릴의 등장으로 인해 ‘악동’이 대중문화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발견했다고 볼 수도 있지만, 반대로 말하면 팝컬처에는 신경 끄고 살아도 행복했을 친구들을 끄집어다가 펑크도 프린세스 할 수 있다고 가르치는 꼴이 된 것이다. 디즈니 애니메이션처럼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콘텐츠에 유색인종 공주가 추가될 때 성취할 수 있는 임파워먼트를 부정할 수는 없으나, 순식간에 백인이 아닌 친구들도 모두 공주가 될 수 있는데 무얼 망설이냐는 기묘한 억압의 논리가 성립된다. 요지는 ‘주류’에 대한 반작용 역시 다분히 철저히 계산된 상품화 기계의 부품이 될 때, 주류에 해당하는 아이콘을 혼내주는 것도, 부상하는 비주류를 대안으로 추켜세우는 것도 소비-나르시시즘을 멈춰 세울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어떤 취향이라도 만족시킬 자신이 있는 이미지-소비-자본주의 기계를 쉬이 탈출할 길은 없으며, 모두가 자신만의 롤모델을 좇아 그럭저럭 행복하다면 그 바깥을 상상할 이유도 없는 것이다.

하지만 간혹 상상가능한 거의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고도로 발달한 자본주의와 이에 봉사-기생하는 소비-나르시시즘을 초월하는 순간들이 포착된다. 이때 ‘초월’이란, 자본주의-기계와 무모한 전면전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과열된 오작동을 통해 불필요하게 생산된 초과분에서 발견된다. 그 어떤 ‘개성’도 맛있게 집어삼키는 이미지-소비-자본주의 기계가 생산해낸 과잉된 기표를 덕지덕지 발라 반사판 삼는 여성들 말이다. 가령, 카디 비와 니키 미나즈가 육화한 하이퍼섹슈얼리티는 특정한 남성-개체를 공략하기보다 미디어가 재생산하는 왜곡된 섹슈얼리티를 고장난 솜사탕 기계에 갈아넣었을 때 튀어나온 괴작에 가깝다. ‘인공적으로’ 설계된 얼굴과 체형, 파편화된 신체부위의 극대화된 노출은 우파 백인 가정을 위협하는 한편 여성을 대상화하는 팝컬처-기계와 갈 때까지 가보자며 폭주하는 치킨 게임을 벌이고 있다.[5]

다른 한편, B급 포르노 영화의 탈을 쓰고 동시대 셀카 정치의 심연을 들여다보는 심리 스릴러 영화 <캠걸(Cam)>(2018)도 주목할 만하다.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캠걸(우리나라로 치면 수위 높은 스트리밍으로 돈을 버는 VJ 정도로 볼 수 있다)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만드려고 했던 Isa Mazzei는 캠걸의 작동방식에 대해 아무리 말해도 알아듣는 사람이 없어서 대신 호러물을 만들어버렸다고 한다. 극중 ‘앨리스’는 ‘FreeGirlsLive’에서 ‘롤라’라는 활동명으로 일하는 캠걸이다. 어느날 앨리스는 스트리밍 중 분장과 가짜 피를 활용해 칼로 목을 긋는 자살 퍼포먼스로 시청자를 끌어모으는 데 성공한다. 치열한 경쟁과 몇 가지 무리수 끝에 톱 50위 안에 들지만, 앨리스는 하루아침에 계정을 뺏기고 만다. 어느날 갑자기 비밀번호는 바뀌었고, 자신과 똑같이 생긴 여자가 대신 스트리밍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앨리스는 조사에 착수한 사이 가짜 롤라는 권총 자살 라방, 1위 캠걸 ‘베이비걸’과 합방 등으로 인기를 끈다. (스포 주의!) 사건의 전말은 미지의 배후(스트리밍 사이트 자체로 의심되지만)가 잠재력 있는 캠걸을 AI캠걸로 만들고, 진짜 캠걸로부터 계정을 빼앗아 더 극단적이고 효율적으로 운영해왔던 것이다. 결국 앨리스는 자신의 카피와 정면승부를 하기로 한다. 앨리스는 롤라 봇의 채팅방에 입장해서 서로의 행동을 따라하는 게임을 해서 시청자의 반응이 좋은 사람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한다. 몇 차례 시시한 거울 놀이를 하다가 앨리스는 돌연 책상에 얼굴을 박아 자기 코를 박살낸다. "내 얼굴을 훔쳤으니 이제 돌려줘!" 롤라 봇은 동작은 대충 따라하지만 철철 흐르는 피와 독기품은 표정까지 따라할 수는 없다. 앨리스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한듯 롤라봇에 렉이 걸린다. 승기를 잡은 앨리스는 보상으로 계정 비밀번호를 받아 롤라봇을 삭제한다. 이로써 일개 여성-관종-노동자는 관심 경제와 성도착자의 연합을 가속화하여 난공 불락의 플랫폼-인공지능에 글리치를 일으키는 데 성공한다.

초과잉-나르시시스트(이때 ‘나르시시스트’는 비난조의 함의를 그대로 가져간다)는 그 누구를 위해서도 ‘옳은’ 선택을 하는 이들은 아니다. 캠걸 앨리스는 그 고생을 하고도 새로운 아이디와 콘텐츠로 다시 캠걸에 도전한다. 타블로이드는 크고 탐스러운 엉덩이를 위해 무리하게 지방과 실리콘을 주입했던 헐리우드의 셀럽의 수술 부작용을 밀착 취재한다. 초과잉-나르시시스트는 ‘같은 여자가 봤을 때’조차 문제적이고, 반동적이며, 체제에 기생한다. 하지만 이들은 어디에 어떻게 존재하는지조차 불분명한 ‘규범적 여성성’ 코드에 과잉 충성함으로써 그것이 오류를 일으키는 지점, 즉 굴절되어 왜곡되는 양태를 노출하는 것이다. 물론 이 굴절이 정확히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어디로 향하는지는 예측 불가하다. 단지 그것이 간혹 일으키는 굉음을 따라 이미지-소비-자본주의의 바깥을 감히 상상해볼 따름이다.

 


[1] 첫 두 문단은 웹기반 리서치 프로젝트 “(Not) Your Typical Narcissist” (2019~)의 일환으로 발간한 자료집 『여성의 자기표현에 대한 예비적 고찰』(2020)을 요약한 내용이다. 자료집 전문은 프로젝트 웹사이트(notyourtypicalnarcissist.com)에 2021년 1월 중에 업로드할 예정이다.

[2] 한민주, 『불량소녀들: ‘스펙터클 경성’에서 모던걸은 왜 못된걸이 되었나』, 휴머니스트, 2017.

[3] “BTS가 직접 댓글 달아준다…‘덕질’ 편해지는 요즘 앱,” https://news.joins.com/article/23721413

[4] 이 예시가 너무 촌스러웠다면, 2019년 중후반에 미국 10대를 중심으로 우정 팔찌, 곱창밴드, 파스텔 톤 타이다이 티셔츠, 크록스, 칸켄백으로 무장한 평범한 듯 예쁜 ‘VSCO girl’ 스타일과 ‘난 너네들과 달라’ 정신을 육화하여 오버사이즈 조거 팬츠와 볼드한 프린트 자켓, 고글 등을 휘감은 빌리 아일리시 추종자의 대립도 생각해볼 수 있겠다.

[5] "The WAP uproar shows conservatives are fine with female sexuality – as long as men control it," https://www.theguardian.com/commentisfree/2020/aug/15/cardi-b-megan-thee-stalion-wap-conservatives-female-sexuality

http://www.zineseminar.com/wp/issue06/narcissist-y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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